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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삶과 비워낼수없는 슬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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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요한
날짜 : 17-10-24 11:01
조회 :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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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음악방송에 올렸던
저의 사연글입니다
본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한다는건 쉽지만은 않았지만
나로써의 삶은 어떠했는가란
시간이 되어 보고자
글을 써내려 갑니다
1981년 5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랑과 축복속에 태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다는 이유는..
목사님의 막내 아들로..
교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
1남2녀의 자식들을 물론 다 사랑하셨지만
갓태어난 저는 자주 경끼가 일어나고
아이가 갑자기 숨을 쉬지도 않고
애간장을 무단이도 태웠던 터라
부모님의 남다른 사랑을받고 자랐습니다
가난한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행복했던 소중한 시간이였습니다
우리 다섯식구는
개척 교회를 하시는 아버지로인해
이사또한 많은곳을 다녀야 했습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친구들도 ..
친해질만 하면 다른곳으로 ..
12번정도 이사를 다니고
정착하지못해 가난은 점점 더해져만 가고
가족들은 점점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어느덧 성인이된 누나들은
집을 하나둘씩 떠나 일을 해야만 했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막내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께 간곡히 말을 전함으로
자식위해 3년이란 세월을
한곳에 머물렀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공부에는 뒷전이였던 상태..
질풍노도의 시기가 들어서다 보니
자꾸만 어긋나는 생활화 불만불평만 자라나고
심지어 학교폭력 써클에 들어가며
방탄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였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자식위해 일만 하신 상태셨고
아버지는 본인이 선택한 목회자의
길로만 가시는 원망스러웠던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고3..
2학기가 될무렵..
학교에선 취업을 나가야만 했던 시기에
온국민을 힘들게 했던 IMF가 있었기에
취업문을 두둘 이기란
여간 쉬운게 아니였습니다..
저는 집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하였고
당시 어머니께선 식당일을 다니셨지만
식당도 문을 닫는 시기라 해고를 당하시며
몇달못가 심지어 쌀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선 라면 한박스를 사오시곤
이게 우리집 먹을게 전부다 라며
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보았습니다
19살 그 나이에 그눈물의 의미가
제 가슴을 메어오게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를 뒤로한채 집을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막노동을 해보았고
그곳도 IMF의 여파가 컸던지
그 흔한 목장갑 조차 주질 않았습니다
각자 집에서 가져와야 한다며
맨손으로 모래와 시멘트를 등에지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삽질을 하고
손에 물집 터져가며 12시간을 일하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그당시 4만 5천원을 벌어 집에 돌아와선
흙투성이가된 제 모습을 보며
어머니께선 너 어디갔다 왔길래
거지꼴이 다되어서 왔니? 물으십니다
그런 모습에 속상해 하실까..
친구랑 놀다가 부모님 농사일
도와주고 와서 그래요
거짓으로 말을 전하곤
어머니께 전할 편지 한통을 써내려 갔습니다
엄마 그동안 철없이 굴어서 미안해
나도 이제 조금있으면 성인이니깐
나도 도울께 혼자만 힘들게 해서 미안해..
사실어제 내가 일해서 벌어온 돈이니까
쌀 사세요란 글과 함께 주무시고 계신
베게 밑에 편지한통과 돈을 남겨두고
일을하러 나갔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지치고 힘든 절 안아주시며
어머니께선 다시 돈을 건내주시더군요
자식이 힘들게 벌어온 돈을 어떻게
쓰겠냐며 내일부터 아버지가 버실거니깐
그간 못했던 공부나 열심히해라 말씀하시더군요
공부도 안하고 철없이 사고만 쳤던
어머니는 다 아셨던 모양입니다
조금씩 철이든 제 행동들이 대견하고도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나 봅니다
가난은 정말이지 싫었고 대학보단
일을 선택하며 졸업후 첫직장을 들어가
군대가기전 까지 일만 했습니다
그러다 군대가기 8개월 앞둔 무렵
어머니께선 일을 하시다 쓰려지셨고
팔삭둥이로 심장에 구멍이 난 상태로
기형으로 태어났다는걸 처음 알게되었고
어머니는 큰 수술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제가 군대에 가는 모습까지
지켜보시곤 입대를 하게 되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했던말이
앞으로의 삶은..
10년이란 말을 하시더군요..
걱정이 이루 말할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내가 이곳에 있는동안
무슨일이 생기지 않을까란 근심걱정..
제대 할때까지 건강하시다면
고달프고 가난했던 불쌍한 내 어머니를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제대후 다짐과 함께
대학이란 문턱은 기대도 하지않았고
제대한지 일주일 만에 직장에 들어가
7년만에 그렇게 소원이셨던
어머니의 명의로된 집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옥같은 세월이였지만
어린아이 마냥 다정한 아들이 남편같고
효자라며 이웃들께 자랑하고 다닌 모습에
저또한 뿌듯한 삶이였지만 한편으론
의사 선생님의 말이 자꾸만 기억이나
살아계시는 동안 더 많이 웃게 해드리고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것 같습니다
어는덧 저는 3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그간 부모님께선 주름이 늘어만 가시고
결혼도 해야할 나이가 되고
생각이 깊어져가는 시기가 찾아 오더군요
이제부턴 나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당시 생산직 직원이였던 저로써는
현실이 막막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지인의 소개로 S사 설비 수리업체 기술영업
취직 제의를 받게되었고 11평 남짓한
초창기 멤버로 사무실에 취직을 했습니다
이제막 시작한 회사라
제겐 큰 도전이였습니다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포기하고
올라왔기에 두려움도 컸지만
면접때
저와 비슷한 가난의 삶과
대표님은 이룰수 있다는 성공의 목표와
저와 같은 고졸 출신이란 점이
진실성있게 느꼈 졌습니다
처음 다뤄보는 기계설비 들을
밤새 분해 조립하며 영업또한
보고 듣고 배우며 할수있단 자신감과
가고자 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년간 고생끝에
11평 남짓한 사무실에
대표님과 저..
둘밖에 없던 회사를 어느덧 120평 규모와
직원들이 늘어난 회사로 발전해 나가며
높은 직급과 연봉을 높이며 꿈을 키웠고
어머니께 좋은것만 입을것 먹을거
비행기태워 제주도 여행도 보내 드리고
소소하고 여유로운 삶으로 변했고
이제 앞으로도 행복할 나날만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그해 2016년 7월 중순..
갑자기 어머니의 이상증세와
배에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녔지만
15년간 병원에서 먹던 약들은
독성이 생겨나 모든 장기가
손상되신 상태셨습니다
이젠 어머니의 운명이 얼마남지 않으셨다는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시려는 의지가 강하셔서 10년보다
5년더 버텨오신 어머니..
하지만 죽기보다 싫어하시던
병원은 가시지 않으려 하셨고..
자식이 힘들게 번 돈을
제가 어릴적 그러셨던 것처럼
본인때문에 자식에게
피해주기 싫어 하셨던 내 어머니..
그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병원에 가시길 설득하고자
전 긴 휴가를 냈고 집에서
걷지도 잘 드시지도 못하신
내 어머니를 보살펴 드렸고
대소변 가리지도 못한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주려 하는데
엄마 이전에 여자다 보니
부끄럽고 수치심에 자꾸만 화만 내셨습니다
속상했지만 애써웃으며
엄마가 나 아기때 다 해줬잖아..
그동안 주신사랑 이젠내가 갚는다 생각해요..
그러니 병원에 가서 치료받자
나 장가가는 모습도 봐야지
다독거리며 오랜 설득끝에 알겠다 말씀하셨고
병원을 나섰지만 위급한 상태 셨습니다
중환자실에서의 여러번의 고비와
치료에 지친 어머니의 모습
이미 손쓸수도 없다는 이 지옥같은 곳에
어머니를 왜 데리고 왔는지
제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더이상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사설 응급차에 실어 두시간을 달려
집근처 호스피스 병원에 도착한 후
2시간여만에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월9일 오후 6시35분
향년 63세..
젊으신 연세에 임종 하셨습니다
전 .. 멍하니 믿겨지지않아
이미 심장이 멈춘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의 심장을 제 손바닥으로 치며 일어나라며
하늘이 떠나가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3일간의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모든 친척 가족들이 오시던 가운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분이
보좌관들과 나타나
어머니의 영정 사진앞에
명복을 빌어드리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국회의원 김철민이란 분 이셨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제 어릴적 같은 동내에
옆집살던 분이였는데 삶이 어려웠을 시절
가난했던 부모와 아들에게
선을 베풀었던 행동에 대해
그 아들은 어머니의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았다며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소식을 전해듣곤
오게 되었습니다 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였고
힘든삶을 사시면서도 같은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셨구나
내어머니가 존경 스러웠습니다
많은분들이 함께여서 외롭지 않으셨고
그리고 어머니의 화장..
이젠 정말 마지막 가시는길
오열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납골당 안산하늘공원 어머니의 유골함 안치..
안치함속 벽면과 액자엔 외롭지 않으시게
가족들의 사진들과 글귀를 적어 넣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
목메어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엄마 ..
저희는 너무도 그립습니다 ..
자식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엄마 ..
힘든 병마와 싸우면서도
자식생각에 아픔을 참으신 엄마 ..
이제는 모든걸 내려놓으시고 ..
하나님이계신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세요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
내 삶에 전부였던 분을 떠나보내고 저의삶은
이세상이 멈춰버린듯 의욕도 꿈과 희망도
무의미하게 느껴진 시간들의 연속과 폐인같은 생활화
매일밤 영정사진을 들고 가슴무너져 내리는 눈물들.
정신을 차츰 부여 잡으니
어머니와 같이갔던 여행코스도 돌아보고
지인들의 위로도 보이고
한달여간 말없이 기다려준
회사 대표님의 대한 고마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어머니께 전 아버지에대한
원망이 너무커 엄마가 혹시나 잘못되면
난 가족을 등한시 했던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을거야란 말을
입버릇처럼 말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어머니께선
원망하지말고 용서해라 말씀을 하셨고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의 눈물을 보며
어머니의 유지대로 아버지를 용서하며
더욱 잘해드리려 노력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새벽에 어머니가 주무실때
방문을 열어보며 숨을 쉬시는지 그모습을
지켜보면서 안도하며 잠을 청했는데
어느순간 부터인지..
아버지의 방문을 열어보며
숨을 쉬고 계시는지
지켜보며 잠을 청하게 됩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다면
이제는 모든걸 용서하고 안아주시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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